0.
트위터에서 쓴 짤막한 글들을 블로그에 옮겨본다.

1.
돔 헬더 카마라 :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면 성자라고 불리지만, 그들에게 빵이 없는 이유를 물으면 공산주의자라고 불린다." (출처 불명)

영어로 번역된 버전이 여러 형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우리말로 옮긴 것. 시사인의 신호철 기자가 포르투갈어(?) 원전을 구글 검색을 찾아서 확인해주었는데, 그걸 기억하지는 못하고 "출처는 분명하다"는 정도로 정리.

때로 이유와 원인을 묻고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불온함이 되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 은폐할 것이 있을 때 그렇다.

2.
"집에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학교에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군대에선 고참 말 잘 듣고 직장에선 상사 말 잘 듣고. 너희들(?)이 원하는 건 말 잘 듣다가 죽는 거냐. 절대로 안 들을 테다!"

3.
통제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 혼란, 소요, 그런 것이 공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반대로 통제할 수 없는 혼돈이 위안이 되는 경우가 있다. 단순하면서도 폭력적인 원칙(예를 들면 자본)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지배할 수 없을 거라고 위안할 필요가 있을 때 그렇다. (질서 : 혼돈 = 친숙한 것 : 낯선 것, 으로 이해하는 등식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발적으로 성장하고 증가하는 복잡성'이라는 것이 또 위안이 되는 경우는, 학교에서의 경쟁의 논리이다. 사교육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 아이들은 다 다르고 예측이 불가능하니까 그런 뻔한 메이트릭스를 벗어나는 결과가 만들어질 거라는 믿음.

4.
"다른 영역의 지식에서 발견한 새로운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고 해서 애초의 지식에 새로운 내용이 부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연상과 이질적인 함의를 끌어옴으로써 혼란만 가중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것을 새로운 통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떤 블로그의 글을 보고 든 생각.


1.
모든 철학자들에게는 배울 게 있다. 그래서 항상 철학자를 읽는다는 건 부분적인(혹은 규정적인) 승인과 부정의 관계를 맺는 거다. "난 너의 모든 점이 싫지만, ..... 이건 정말 싫군."(응?)

2.
콰인은 후배 철학도에 대한 조언에서 학위 논문을 쓸 때 사람에 대해 쓰지 말고 문제에 대해 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미 철학이기에 그렇지 않겠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누구" 전공이라는 말을 들으면 좀 당혹스럽다. 문헌 비판을 통해 텍스트를 확립하고, 렉시콘을 만들고, 개인적인 전기적 사실들을 확정짓는 기초작업이나 주석서나 해설서를 쓰는 작업은 전체적인 철학 공동체의 연구라는 제도 속에서 가치가 있는 일이지 그 자체로 1차적인 철학적 연구라고 할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제 전공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제3부의 제1장입니다." "...... 그래서 뭐 어쩌라고."

3.
철학 공부를 철학자 공부와 착각하면 공부가 매우 힘들어진다. 한국에 '유행'처럼 들어오는 이론가들을 생각해 보자. 최소한 한꺼번에 들어온 그 사람들을 모두 읽고 그 맥락을 파악하고 계보까지 이해하려면 책읽기는 끝이 없다. 누구를 선택하든 현대 유럽 철학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하이데거와 니체(혹은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추가해서)는 꼭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헤겔을 읽지 않고 이들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칸트 없이 헤겔을 이해할 수 있나?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할 건 엄청나게 늘어난다. "나이 마흔, 정말 20년 간 쉴새 없이, 정말 끊임없이 읽고 공부해 이제 드디어 아도르노에 대해 한 마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뭔가요?" "벤야민이 더 고수에요." "......" "이제 10년간 벤야민을 중심으로 더 읽으려구요." "......"

4.
시게후미 모리라는 수학자가 있다. 필즈상을 받은 인물이지만, 다른 동료 수학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그가 선택한 분야는 매우 어려워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다. "모리 교수의 동료들 몇몇이 아직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어쩌다 모리 교수 밑에 들어온 학생이라면 좀 다르겠지. 자기가 보는 교수들이 다 그 분야의 대가들이니까 말이다. 이 학생이 교수들에게 '속아서' 가망없(지는 않지만 조낸 고달픈 학자 생활을 보장하)는 분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학문 분야를 조망하는 게 필요할 거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려면 (수학 세부 분류표에 기반해) 최근 어떤 분야의 논문들이 많이 나오며 어떤 분야가 주목받는지(각종 수상 여부 및 교수직의 TO)를 따지고, "수학의 현재와 미래 : 동향 보고"를 주제로 대가들이 쓴 책이나 논문들(예를 들어 밀레니엄 기념으로 나온 Mathematics Unlimited and Beyond 같은 책)을 보고 그 분야의 미래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봐야 할 거다. "교수님." "응?" "이 분야의 논문은 왜 우리 대학 교수님들 것 밖에 없나요?" "그, 그야 너무 주, 중요하기 때문에......." "거짓말." "......"

하지만 누가 '모든 걸 다 보고 읽고 들은 뒤'에 판단을 내리겠나. 우리 "제한된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철학 연구에도 적용해 보자.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중요성과 우선 순위를 판단하기 마련이다. 설마 철학 전공자들만이 특별하게 "다 훑어보고"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 철학 공부 하는 사람도 다른 모든 분야의 전공자들처럼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어디선가는 "스스로 판단하고 검토하는 일"을 포기하고 "들은 것에 의존해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한국이라는 이상한 상황에서 주로 정치적인 함의와 맥락을 지니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현대 유럽 철학자들을 매우 좋아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들이 유럽이건 미국이건 "철학자 공동체"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주로 "문학 평론", "문화 연구", "비판 이론" 등의 분야에서 다루어진다. 냉정하게 말하면, 오늘날의 대중적인 철학 담론은 그저 한국이라는 나라의 지난 수십 년을 문학적 지식인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의 결과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아감벤, 랑시에르, 낭시, 바디우는 필독서인 거 같아.""아 씨발, 이제 좀 그만해" "응?" "아, 미안. 토닥토닥, 니가 무슨 죄가 있겠니." "......."

5.
"너 그거 좀 읽고 떠드니?"라고 물으면 나는 "넌 중급 논리학은 떼었니?"라고 묻겠다. 세상에 중급 논리학을 떼지도 않았으면서, 괴델의 정리를 운운하는 라깡에 대해 논한단 말인가. 게다가 라깡을 까는 소칼에 대해서는 무시하겠지? "자신이 신뢰하는 선배와 스승들"이 무시해도 된다고 하니까. 그렇지? 응? 하지만 그건 무슨 망발이야? 철학도라면 엄밀한 자기 비판부터 해야지. 자, 얼른 가서 괴델부터. 응? 그리고 원문은 독일어니까 독일어로 읽고. 응?

기분 엿같지? "라깡은 읽고 비판하시나요?"라는 반문을 들으면 내가 울컥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야. 토닥토닥. 그리스어랑 라틴어는 떼고 플라톤과 스콜라 철학 이야기 하냐? 내가 데까르뜨는 스콜라 철학에서 모든 걸 다 베꼈다, 사실 데카르트보다는 스콜라 후기 철학을 읽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 뭐라고 할래? 직접 안 읽었으니 할 말 없어야 하는 거겠지? 데까르뜨가 중요하다는 건 철학사 책에서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 사실 나도 에띠엔느 질송과 로저 아리우를 읽고 하는 소리야. 누가 다 읽고 비판하냐. 그 논리를 자기한테 돌려봐라. 니가 철학에 대해 할 말이 몇 문장이나 되겠나. 이 뻔뻔한 새꺄!

....... 라는 흥분은 진심이 아니니 차분하게 말을 하자면

나는 그냥 딜레땅뜨기 때문에 이것저것 훑어봤지만, 대부분의 철학 연구자들은 자기 분야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떠든다. 그러니 시게후미 모리 교수를 뒤따르는 대학원생 꼴이 되지 않으려고 훑어본 것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분야와 지역, 스타일을 막론하고 비교적 그 중요성이 '넓게' 합의되는 철학자는 내가 볼 때 하이데거까지다. 그 다음에 몇 명 더 거론하고 싶기는 하지만, 아마 한 명을 더 고르라면 푸코까지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라깡같은 듣보잡의 경우라면 '왜 읽어야 하는지'를 설득해야 하는 그런 수준이라는 거다. 심리학에서도 역동심리학이나 임상심리학에 포함되는 정신분석의 (그것도 꽤 특이한) 한 분파에 불과한 라깡주의자들을 우리가 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지 말이다. 소수면 소수파답게 좀 겸손하든가, 아이 썅.

...... 이 흥분도 진심은 아니다.

6.
좀 산만하게 떠들면

언어와 마음, 현실(혹은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를 하려면 어디부터 출발해야 할까? 언어(철)학도가 "라깡이 언어에 대해 뭘 알겠어요?"라고 말하는 게 크게 무리한 일일까? 라깡이 손댔거나 걸치고 있다는 그 많은 분야들 중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분야가 몇 개나 될까? 도대체 어떤 분야에서 라깡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나.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와 같은 구분은 사실 더 이상 심리학 이론도 아니고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초월철학일 뿐이다. 논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예들만을 들어서 "봐, 작동하지?"라고 설명해야 하는. 하지만 이게 잘 들어맞지 않는 분야나 사례에 대해서 고민해 본 라깡주의자는 얼마나 될까? 그냥 그 틀을 "때때로 배우고 익혀서" 써먹고 응용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잖아. 칸트의 초월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읽는 것만큼 라깡도 그 정도로만 비판적으로 읽어 보자는 거지. "태초에 상징계와 상상계와 실재계가 있었다." "네?" "라깡이 그렇게 말했어."

필요가 이론을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니까. (라깡의 몇 가지 통찰에 감동받은 나머지) 라깡의 이론을 메타이론이자 비판이론의 층위에 놓음으로써 그것을 구제하려는 시도는, 라깡이 직접 내뱉은 담론 속에 들어있는 많은 오류와 헛소리들의 부하를 함께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라깡을 이용해야지, 옹호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라깡을 이용하는 것과 이용하지 않는 것이 별 차이가 없다면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그냥 좁은 견문에서 귀결된 개인적 취향이라고 하면 이해는 하겠지만, 그럼 닥치고나 있든가. 왜 선량한 서민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냐고.

7.
크릉.


0.
아이추판다님의 블로그에 라깡주의에 대한 글이 올라와서 댓글의 난이 벌어지고 있다. 주소는 여기.

1.
내가 쓴 댓글은 이런 거다. 제목은 >라깡주의자를 까는 이유<
라깡 정신분석학도 다른 정신분석학처럼 결국 인간의 마음에 대한 하나의 이론. 그런데 라깡주의자들은 라깡을 따라 "상징적인 것의 존재론"을 외우려고하지 "인간 정신에서의 언어의 위치"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언어심리학 논문을 보지는 않거든. 라깡의 "거울단계"에 대해서는 신봉하면서 막상 발달심리학 교과서를 들춰보는 짓도 안하고 말야.

그러니까 이들이 하는 말이 "라깡은 철학"이라는 말로 실증과학의 부담을 피하려는 건데, 그것도 조낸 웃긴 거. 플라톤의 수리철학을 신봉하는 사람이 수학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 말이 돼? 라깡을 공부하는 게 인간(마음, 문화 등등)을 이해하기 위한 거라면, 인간에 대한 다른 실증적인 연구와 상충하면 그건 그냥 버려야 하는 거지. 최소한 그 부분이라도.

그런데 라깡주의자들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으니까, 그냥 라깡 사마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별 개소리를 다 하는 거야. 그러면서 유사 종교가 되는 거지. 오해와 무지로 박해받는 척 개드립을 하는데, 실은 오해와 무지로 가득찬 건 라깡주의자들 자신이라고. "나의 라깡은 그러치 않아. 그런 문제따윈 다 알고 극복하셨을 거야."라는 식이지.

라깡은 흥미로워. 그 재미와 매력을 모르는 게 아냐. 그런데 말야, 어떤 면에서 통찰력이 있다고 해서 그게 그 이론을 정당화시켜주는 건 아니거든. 특히 "인간"이라는 통칭의 명사를 사용하는 건 더더욱 그래. 최소한 과학적 심리학이 "몇 퍼센트" 정도가 그런지, 그런 이유는 무엇일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라깡을 읽은 것들은 아주 당당하게 "인간이란 원래 ~한 존재다."라고 늘어놓지. 몇 가지 개념과 명제들을 받아들인 뒤 그것을 자기 경험과 (좁아터진) 견문에 끼워맞춰 이해하는 거지. 그러고는 빛을 발견한 듯 감탄하며 문학작품을 보건 영화를 보건 사람을 만나건 다 "역시 라깡이 맞아"라는 거라고 질질 싸는 거야.

다시 진지하게 말하는데,

그게 공부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2.
뭐 굳이 더 할 말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철학은 보통 세계를 해석하는 개념의 틀과 그에 대한 메타 담론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언설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철학이 실질적인 내용을 담은 논의를 전혀 담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때로는 특정한 사실적 지식을 토대로 한 메타 담론인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

하지만 "착실한" 철학도들은 이 개념의 틀 자체(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잘못된 습관이 들 때가 있다. 즉, 자신에게 가장 와닿는 (혹은 어쩌다보니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읽은, 혹은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저자를 이해하는 것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그렇게 이해해서 장착한(?) 틀을 가지고 적용하는 것을 글(논문)이랍시고 쓰는 짓거리가 연구이자 공부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이게 헛공부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대충 들어맞는 듯 보이는 선험적인 틀은 절대로 반박되거나 약화되기 어렵다. 이미 그 틀로 세상을 보는데, 그걸 바꾸기가 쉽지도 않고 말이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길게 쓰기 어려우니 이 글은 여기까지.

3.
뭐 라깡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어?



0.
나도 알듯말듯한 말들 몇 자 씨부리고 조낸 신비하고 뭔가 있는 척 하는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건 뭐 유행도 아니고......

평소와 좀 다르더라도 이해해주시길. 계속 이럴 건 아니니까요. 응? 토닥토닥.

1.
종종 개념으로 사태를 포착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개념이 사태를 무한정 만들어내지 못한다. 현란한 수사가 인식을 (또는 현실을) 압도할 때, 가장 좋은 대응책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2.
그 개념에 대응하는 사태가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비중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찻잔 (혹은 두개골) 속의 폭풍"이란 멋진 표현을 이럴 때 쓰자. 거대한 시간의 스케일, 지역적, 계층적 조건과 제약들을 쉽게 무시하고 보편으로 도약하는 철학적 정신은 공허하다.

3.
"Give me the numbers." 왜 인문학이 숫자를 멀리 해야 하는가. 주관적인 편견을 일반화시키는 고질적인 질병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

4.
인문학의 실험 : 고유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글을 쓰기. 고유명사는 긴 설명을 간단하게 줄여주거나 너무나 많은 뜻을 갖게 된 일반적인 개념의 의미를 한정하는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지성의 빈곤함을 감추는 도구로 쓰인다.

5.
제3세계의 문화적 식민지라는 현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인문학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물론 극복을 논하기 전에 철저히 배워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었으면 고전 번역을 그따위로 놔두진 않았겠지. 극복은 다음 세대로 넘기고 그냥 토양이라도 제대로 되든가. 고전의 철저한 학습을 강조하랴, 유행 따라가랴, 그러면서 현실과 맞닿는 창조적인 철학 모두 하려니까 힘들지? 이도저도 못하고 어설프게 유행 따라가며 베끼고 요약해서 팔아먹는 게 공부냐?

6.
"Don't study Foucault. Do Foucault!" 라깡과 노닥거리고 들뢰즈랑 친구하고 데리다를 논한다고 해킹을 우습게 보지 마라. 해킹만한 학자, 한국에 나올려면 멀었으니까. 마이클 프리드만, 프레드릭 바이저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 논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명료하게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세상을 뒤집지 못하면 이해한 것이라도 명쾌하게라도 쓰라고.

7.
소망 사고라는 유아 상태를 벗어날 필요성. 그렇게 보고 싶다고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잖아? 욕망이 생산이면 좋겠어, 결핍이면 시러.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소통하는 다중이 있었으면 좋겠어, 규정되지 않는 차이의 놀이가 조아......

닥치고 나가서 삽질부터 막아라.

8.
의도와 결과의 혼동. 도대체 언제까지 의도에 공감하는 것과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의 차이를 명확히 할 것인가. 철학을 하자는 거야, 아니면 선전을 하자는 거야? 니네 말대로 그런 사상사적 혁명이 일어난 거라면 벌써 세상이 열 번은 더 뒤집어졌어야 하는 거 아닐까? 도대체 사상사에서 그런 혁명을 꿈꾸지 않은 세대가 있었을까? (물론 찌꺼기들인 너네 빼고)

9.
...... 난 하이데거가 싫어. 걔가 세상에 대해 뭘 알았겠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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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오늘의 되새김 지식. 트위터에서 @pythagoras0 님이 날린 트윗에서 확장된 이야기.

말로 설명하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삼각함수가 뭐냐? 말로 설명해 봐."라고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뇌가 마비되기 마련. 하지만 그림이나 도표를 그려도 좋다고 하면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그럭저럭 설명해낼 수 있다. 하지만 기하학적인 이해와 공리적인 이해, 그리고 그것을 말로 풀어내는 개념적 이해가 통합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건 명확한 사실.

"직각 삼각형에서 직각이 아닌 꼭지점의 내각과 삼각형의 세 변 사이의 관계를 삼각함수라고 한다"고 이해하면 아직 중등 수학의 단계.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반지름이 1인 단위원 위의 한 점 X(x,y)가 있다고 할 때 원의 정의에 의해서 x^2 + y^2 = 1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원점 O와 점 X를 잇는 선분 OX가 X축과 이루는 각도 θ(라디안)와 x, y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함수를 정의할 수 있다. sinθ = y, cosθ = x, tanθ = y/x." 뭐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이제 고등학교 수학 수준인 거다.

물론 이런 설명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원을 그리고 도형을 그리면서 이해할 것이다. 이런 명쾌한(응?) 설명에 대해 치를 떠는 사람들 상당수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싶고. 이렇게 초보적인 기하학적 직관으로부터 출발해 좀 더 추상적인 개념(과 그 기호)이 정의를 통해 도입되고 새로운 정리가 도출되고, 그러면서 수학의 내용이 풍부해지는 것이겠지. 중간에서 잠깐 정신을 잃었다간 전체적인 조망(개념과 개념 사이의 관계, 정리와 정리 사이의 관계 등)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건 당연한 사실.

철학이라는 게 역사적인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개념들을 다룬다고 한다면, 최초의 출발점은 역시 구체적인 (사태와 대상의) 이미지들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자꾸 관념의 고공비행 그 자체의 현기증나는 스릴에 빠져 지상의 이미지들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면, Seyn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시간을 좀 아껴서 sine을 공부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후다닥)



0.
우리 둘을 아시는 분은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우리 김우재가 날 미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과학자들에게 덧씌워진 천재/괴짜 이미지를 재생산해내는 일화들을 많이 알고 자주 인용하기 때문이다. Real Science를 대중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김우재로서는, 삼류 스포츠 신문의 찌라시 기자만도 못한 나의 작태가 상당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을 거다(용서해라, 김우재). 하지만, 나는 이 우주의 먼지같은 존재들 사이에서 그런 희귀한 종자들이 잠깐이나마 반짝거렸다는 사실에 대해 함께 키득거리고 싶어하는, 소박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일 뿐이다. 천재에 대한 동경과 질투,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어쨌거나 재밌는 사람들이잖아.

...... 연쇄살인마를 재밌다고 하는 것보다 덜 비난받는 취향이기도 하고 (외면).

1.
폴 디랙의 전기가 New Scientist에서 뽑은 "올해의 과학책 10권"에 꼽혔다. 디랙은 이곳에 들르는 누구나 잘 알고 계시겠지만(응?) 특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한 방정식을 만들었다...고는 하는데 아직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반물질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예측한 장본인이기도 한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가 아는 건, 이 인간이 지독히도 과묵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디랙의 제자들은 1 Dirac이라는 단위를 만들었는데 "word per year", 즉 1년에 한 마디를 하는 것이 1 Dirac에 해당한다.

과묵한 인간들은 대체로 타인에 대한 배려에 서툰 인간 말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디랙은 겸손했지만, 진짜 겸손이란 타인의 심정을 알고 헤아리는 데 존재하는 거지, "내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스스로를 낮추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디랙이 동료들을 존중하기 위해 장황하게 남들 다 아는 얘기는 빼고 최대한 간결하게 논문의 요지를 설명하려고 애쓸 때, 슈뢰딩어는 뒤에서 이렇게 투덜거렸다. "쟤는, 지 논문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디랙이 강의를 하면서 칠판에 방정식을 여러 개 쓰고 있을 때였다. 그가 필기를 하면서 글자를 하나 틀렸는데,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교수님, 2번 방정식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나 이미 대가의 과묵함과 빠른 진도에 주눅이 든 그의 목소리는 작았기에 디랙이 듣지 못한 듯했다. 계속 필기를 하는 디랙에게 이 학생이 다시 손을 들고 조금 더 큰 소리로 "2번 방정식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디랙은 여전히 듣지 못한 듯했다. 보다못해 맨 앞줄의 학생이 "교수님, 저 뒤에 질문이 있다는데요."라고 말을 하자, 디랙은 그제서야 몸을 돌렸다. "질문이었나? 난 무슨 발표를 하고 있는 줄 알았지." ....... 아니, 발표라고 해도 말이지.....

영문판이 번역되기를 기다리면 한 3년 걸릴 테니, 기사를 본 김에 디랙의 전기를 구해서 읽어봐야지...... 라기보다는 이미 구했.

2.
소중한 수학도 블로그를 운영중이신 @pythagoras0님이 전해주신 야코비(1804-1851)의 일화 하나. 수학에서 독자적인 연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심금을 울리는) 격려.

He encouraged students to do original work before they had read all the previous work on a topic. As he said to one student: ‘Your father would never have married, and you wouldn’t be here now, if he had insisted on knowing all the girls in the world before marrying one’.
그는 학생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기존의 저작들을 모두 읽기 전에 독창적인 작업을 하라고 격려하곤 했다. 그가 한 학생에게 말했듯이 "결혼하기 전에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너희 아버지는 결혼을 못했을 거고 너도 여기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늦어지더라도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알아야겠다"고 마음먹는 그 무모한 용기는 얼마나 또 아름다운...  

네? 제 얘기는 아닙니다. 저 그래서 결혼 못한 거 아니에요. 도리도리. (땀)

물론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피타고라스님의 수학노트(http://pythagoras0.springnote.com/)를 소개하기 위한 것. 다들 알고 있는 거죠? 응?

보너스.

수학과 교수(아마 학과장)가 대학원 신입생들 축하연에서 축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주어진 코스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박사학위를 따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자네들 중 한 두 명은 (더 노력해서) 수학자가 될 수도 있겠지요."

...... 흐음?


1.
트위터에 @lezhin @dark_serika님이 활동중이다. 응? 누군지 모른다고? 뭐 굳이 http://lezhin.com과 http//serika.kr을 필수 즐찾 사이트라고 권하지는 않겠지만, 무려 "훌륭한 블로거"(출처 : http://yeinz.kr/blog/573)인 이승환 수령(http://realfactory.net)조차도 따라갈 수 없는 지하 세계의 대부들이라는 정도의 아주 소박한 찬사를 늘어놓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제 고아라(http://goara.tistory.com)님만 트위터를 시작하면 된다 (응?).

2.
뭐 아름답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저질 블로그/블로거들을 소개하려는 건 아니고, 내 타임라인에 이런 분들과 노회찬, 심상정 현/전 진보신당 대표의 멘션이 같이 뜰 때의 묘한 기분이랄까, 그런 걸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아직 본 적은 없지만, 둘이 대화를 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다. 예를 들자면 심상정 전 대표의 멘션에 정치에 전혀 무관심하지 않은 레진사마가 리플라이를 날리고 거기에 대해 성실하고 진지한 심 전 대표가 대답을 하는 것 같은 (하지만 심 전 대표는 레진사마가 누군지 모르겠지. 모를 거야. 음. 몰라야 하지 않을까?).

3.
꽤 성공한 학원 강사(라지만 실은 원장) 한 분을 안다. 그런데 남성성의 화신인 이 분은 역시 마초 어른답게 '낚시'(진짜로 물에 가서 고기 낚는 그 낚시)가 취미. 동호회에 가입해서 활동까지 하는 분이시다. 이 분이 그 동호회의 '형님' 중 한 분의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그 형님은 용주골(모르시는 분은 그냥 구글링)의 포주(라고 하면 다 알겠지)로 살아오신 분이었단다. 그 형님은 좋은 대학 나오고 세상에서 이름 알려가며 성공한 이 원장님이 그런 거 신경쓰지 않고 소주잔 같이 기울이며 형님으로 대접하는 게 정말 고마우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날 손을 잡으며(는 내 상상이고, 그냥 술 먹다가)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꼴보기 싫은 새끼 있으면 3명만 말해라. 내가 지워줄께."라고하시더란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아 그건 <친구>에 나오는 뻔한 대사잖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나름 그 원장님이 철 안 든 내게 인생의 훈계 같은 걸 들려주는 대목이었기 때문에 츳코미는 자제. 뭐 그 요지는 "세상 살려면 사람 가리지 말고 친구로 사귈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는데, 사례가 적절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4.
우리 어릴 적 도시전설 중에는 네트워크 이론의 six degree 법칙을 미리 선취한 것도 종종 있었다. 나이트(그때만 해도 디스코텍)에서 여자를 만나 원나잇을 했는데, 친구네 집에 가보니 누나라고 나왔다더라, 뭐 그런. 실제로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지만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은 아니다. 세상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는 것과 세상이 점점 더 좁아진다는 것은 모두 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얽힘의 구조를 경험적으로 느끼며 산다. 점점 나쁜 짓하며 살기가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어서 다시 익명의 아름다운 세계를 돌려달란 말야! (응?)

5.
당신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이 모르는 은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당신을 기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건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경험이다. 이것을 공포이자 현대성의 본질적인 체험으로 형상화한 것이 카프카인데, 예를 들자면 그의 단편에서는 한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가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소홀히 했던 친구가 자신의 아버지와 지속적으로 편지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아버지는 친구의 편지를 들이밀며 주인공의 소시민적인 비열함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이 아들은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기 위해 강물로 몸을 던진다. "아버지, 사랑해요." 카프카적인 상상의 세계에서는 법원의 작은 문을 열고 나가면 왜인지 모르겠지만 약혼녀 집의 정원이 나오고 (약혼녀는 물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법원이요? 저는 그런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요?"라고 반문하겠지), 약혼녀의 집 뒷문은 자신을 심문하는 대법관의 서재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물론 대법관의 서재를 열어주는 사람은 자신을 변론하는 변호사이고, 그의 옆에 서 있는 게 자신을 경멸하는 예비 장모면 딱 좋을 듯하고.

6.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크릉.

7.
아랍 속담에 "아는 사람 없는 동네에 가서든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말이 있다고, 전에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이제 그런 동네는 없어, 라고 친절하게 덧붙여 주는 게 필요할 것 같다.

그러니 상상도 못한 곳에서 저를 발견하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경악하지 마시고...... 응?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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