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학 혁명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예전의 패러다임으로는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새로운 패러다임이 완벽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그 새로운 증거가 모든 토론을 종식시키고 패러다임이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실은 그렇지 않다. 지구중심설에 대항해서 태양중심설이 나왔을 때,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계산이 간단하다"는 외에 예측의 정확성에서 이전의 패러다임보다 나은 게 없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베셸에 의해 연주시차의 측정이 이루어짐으로써 태양중심설의 "확고한 증거"가 주어졌다는 생각하면, 패러다임의 전환은 과학적 토론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지구중심설의 신봉자들 뿐만 아니라 멘델을 무시하고, 베게너를 비판하던 사람들, 아인슈타인의 논문에도 불구하고 원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들 등 늘 "구세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죽을 때까지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사라져 갔다.

 

누군가의 말을 빌자면, 과학의 발달은 토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덤이 늘어나면서 이루어진다. 구세대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생리학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뇌는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신념을 학습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사회학적으로는 기존의 신념에 얽혀있는 많은 가치들(제도, 인맥, 물질적/비물질적 보상 등)이 신념을 버리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신념은 정체성의 일부가 되는데, 아마 프롬이라면 이것이 "신념을 자신의 일부로 <소유>하고 <집착>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런 과학사의 교훈은,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거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 나이 아흔이 되도록 매우 정정하게 사셨다. 하지만 1910년대에 태어나 2000년 대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 결국 인터넷은 배우지 못하셨지만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둔하지 않은 분이셨다. 그 대부분의 '문물'이 나이 환갑이 넘어서 접한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러나, 그런 신문물의 축복 속에서 말년을 보내신 우리 할머니지만 그분은, 분명히 말하지만, "왕정 치하의 정치적 무의식"을 평생 가지고 살았던 분이었다. 어린 시절 그분의 무의식을 파고들었던 어른들의 사회적 담론은 "나랏님"이라는 관념을 토대로 한 것이었을 것이다. 나이 마흔에 대통령이라는 제도를 처음 접하셨고, 나이 쉰에 대통령이 쫓겨나는 보고, 일흔이 가까워서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을 겪어야 했던 우리 할머니셨다. 하지만 나는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두 사람이 우리 할머니에게는 (처음으로 직접 모시게 된) "진짜 나랏님"이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역시 그들처럼 권위주의 체제로 통치하려 한 전두환도 나랏님으로 모셨지만, 나랏님에 대한 존경심은 노태우, 김영삼을 거치면서 희미해지긴 했다. 그리고 여든이 넘은 진짜 말년에 와서는 "빨갱이 김대중"이 나랏님 되는 모습까지 보셔야 했으니 참 험한 꼴 많이 보셨다. 1-2년만 더 사셨더라면 "천민 노무현"이 나랏님 되는 꼴까지 보실 뻔했다.

 

우리 할머니 같은 분들은 시대에 저항해본 적이 없으신 분의 세대였다. 그 자식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거의 100년도 넘은 왕정의 추억이 식민지 지배를 거쳐 독재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정치적 감수성을 통해 유지가 되었던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백 년 전의 문헌을 읽지 못하고 때의 사진이 낯설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오래된 과거는 아니다.

 

3.

"학생이라면 단정하게 머리를 잘라야지"

 

이런 말에 여전히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는 '나(혹은 우리)'가 있다는 것이, 이런 정치적 감수성/무의식이 여러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남의 머리를 자르는 일은 폭력이다. 어떻게 강제로 남의 머리를 잘라라 마라 수가 있나. 군대같은 곳에서나 가능해야만 하는 일을 학교에서도 버젓이 시키고 있는 게, 과연 정상일까?

 

이건 미풍양속도 한국적인 정서도 뭣도 아니다. 조선 시대에야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존재하지도 않았던 감수성이고. 이건 그냥 사회를 병영화시키는 군국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한 광기어린 미친 짓이다. 나치 독일과 전전 일본에서나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해방된 후 수십 동안 그것을 "당연하게" 유지하고 존속시킨 게 이 나라고.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왕조(나랏님)의 추억 + 군국주의 식민지배의 기억 => 독재 권력에 대한 친화력

 

물론 4/19와 87년 6월의 위대한 승리가, 평화적 정권 교체의 승리가 존재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 사회의 저류를 흐르고 있는 물줄기는 위에서 말한 신민주의의 정서다. 이건 밑에 있을 때는 권력에 순응하고 권력에 자신을 동일시하며, 권력을 가졌을 때는 일사불란하게 지휘관의 지시를 따르는 병영처럼 사회가 움직여 줘야 한다고 믿는 감수성이다. 그래서 "당신 보기에 거스르는 것들이 "불온한 것"이 되고 "금지 항목"이 되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4.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감수성이 결코 먼 과거의 것이 아니라는 게 내 얘기다. 사람의 정체성의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이 윤리이고, 윤리는 감수성이다. 이건 신념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생각'을 고쳐먹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이 영역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최소한 성장기에 이런 문화 속에서 산 사람들은 평생 그 영향 하에서 살 수 밖에 없다.

 

과연 지금 사회적 권력의 핵심에 위치해있는 세대들은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위치하는가. 1950-60년대 생이 바로 그들이고, 이들은 1920-30년대 생의 자녀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다. 최소한 전두환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중고대학생 시절을 거친 이들이 지금 이 사회를 좌우하고 있는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 이들이 민주주의적 생활에 대해서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감수성으로 충분히 학습이 되어 있을까? 문제는, 과연 이들은 자신의 자녀 세대들, 즉 1980-90년대 세대들을, 충분히 민주적으로 길러 냈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한다. 촛불을 들고 길거리로 나온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다.

 

5.

민주주의는 가치이고, 가치 이전에 감수성과 공감의 문제다. 그래서 "나라가 혼란스러운데 왜들 들고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어르신들을, 나는 그 생의 노고와 수고에 대해서는 존중할 지언정, 이제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가 되는, 새로운 가치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슬슬 퇴장하셔야할 세대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다. 이건 "늙은 사람은 꺼져라"라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이 어르신들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근간이어야 할 헌법 정신에 대한 공감이 없으신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정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고 존중받는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미성숙함과 불완전함, 그리고 불행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것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우리 할머님이 독재 정권에 한 번도 저항해본 적이 없던 분이지만 내가 그 분을 싫어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 어르신들을 경멸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그분들의 정치적 식견을 존중하지 않을 뿐이다.

 

물론 같은 세대지만 평생 학습을 통해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하려고 애쓴 1920년대생의 김대중 대통령 같은 분도 있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분명 세대의 한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세대론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평생에 걸쳐 학습한 신념을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만 드는 노인의 고집과 그 노인에 대해 반발하며 "노인 세대를 무시하는" 젊은이들의 싸가지없음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면, 정치적 올바름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에 대해서 젊은이들이 아니라 노인 세대의 편을 들었다. 둘 다 폭력적인 소통의 태도지만, 노인 세대가 더 인간적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일반적으로는 아도르노의 지적이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싸가지 없는 젊은 애새끼들이 고집스런 노인네들보다 더 매정하고 비정한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현 시대"에는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 세대의 정치적 경험"이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 등 반민주적인 정치에 대해 아무런 문제점을 찾지 못하는, 그런 낡은 감수성이라고 한다면, 그건 존중하고 타협할 문제가 이미 아니지 않나. 아직도 피를 통하며 "멸공" 구호를 외쳐대고 "반민주 독재 정권에 반대한다"는 시위대한테는 빨갱이라고 욕을 해대는 늙은이라면, 대한민국 헌법을 존중하지 않는 반민주적인 정치 집단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나이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세대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존중과는 별개로, 우리가 그 세대와 "타협" 할 가치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토록 액티브한 노인네들은, "어르신"으로 존경하는 게 아니라 "정치 활동가"로 대우해 드리는 게 올바른 일일 것이다.

 

6.

민주주의가 공감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나는 지금 배제와 갈등을 말하고 있다. 왜냐면, "민주-반민주"의 구도 안에서 민주주의란 "자기 부정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고 인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중동이 "언론의 자유"를 말할 때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은, 이 언론들이 족벌 신문이라거나 친 재벌적이라거나 혹은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라, 조중동이 "언론의 자유"를 말할 자유를 인정받을 수 없는 "반민주적 언론"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민주적 언론을 포용하고 가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

 

황석영이 이 정권에 대해 립서비스를 하면서 "시위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나는 황석영이 (그 세대의 문인들이 그렇듯이) 그다지 민주적인 감수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김지하도 그렇고 이문열도 그렇고, 매우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이제 역사적 역할을 다 한 세대들이다.

 

적어도 민주주의가 성숙한 곳에서라면 시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서 "거시적으로 대범한 시각"을 가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 국가 권력이 항상 국민을 무서워하고 조심하고 시민들이 항상 국가 권력을 경계하고 감시하는 민주적인 체제가 완성된 뒤에야 "절차 그만 따지고 효율성을 높이자"라든가 "일을 하다 보면 불가피한 희생이 생기는 법"이라는 식의 현실적인 주장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균형이 맞다. 적어도 민주화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깊이 통찰하고 있는 인간이라면, 함부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왜냐. 유기체적 국가주의, 국가가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다보면 암적인 존재나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파시스트적인 논리가 여전히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석영은 "좌우"를 넘나든 게 아니라 현실의 파시즘과 손잡으려고 것이다. 그게 현실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현실'이 황당하다보니 우리는 '민주-반민주'를 '진보-보수'라든가 '좌-우'로 착각하는 착시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조중동을 반대하고, 검경을 규탄하며, 용산 참사에 대해서 항의하기 위해 길거리에 나가는 일이 "극렬 좌파"라든가 "전문 시위꾼"의 일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 배운 사람들로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이건, 민주-반민주의 문제가 맞다. 다만 우리가 그걸 인정하면 엄청나게 말도 안되는 총체적인 부조리, 현실 전체와 갈등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뿐이다.  

 

7.

2010년대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민주-반민주, 파시즘 운운하는 게 시대착오적으로 보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이 시대착오적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비상식적이고 반민주적인 일들을 "한국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해야만 할 것인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치적 의식, 정치적 현실은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라 버마(미얀마)나 타이(태국), 인도네시아의 그것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아직도 식민치하, 독재 권력 하에서 살던 감수성을 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쥐고 있다. 그들의 감수성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비민주적이고 반민주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P.S.

이런 사태들에서 가장 교활한 위치에 있는 것이 중립적인 제3자인 양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그저 "대립" "정쟁"이라고만 상대화시키는 동시에 거기에 정치적인 것을 초월한 "인간의 기본 윤리"라든가 "상식"이라든가 하는 가치의 잣대를 들이밀 수 있는 것처럼 까대는 3류 저널 블로거들이다. 내 생각에 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쥐새끼들에 포함시켜도 될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 이런 "증오와 적대"가 더 문제라고 설레발을 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 사태에서 애초에 문제가 되는 근본적인 가치(의 결단)이라는 문제를 도외시하고 제3자적 입장이라는 게 가능하다는 사고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건 이해관계 및 이데올로기를 은폐하기 위한 유치한 가면일 뿐이며, 막상 따지고 보면 저열한 기만일 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좌파가 아니다. 난 세금 올리는 게 싫다. 자유주의자고 정부의 간섭이 싫고 미국보다 더 낮은 세율을 유지하길 원한다. 복지 정책도 시장친화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며 후기 자본주의에 대한 만델의 분석을 읽느니 시카코 학파 논문을 읽는 게 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시장주의자인 동시에 민주주의자다.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신념은 대한민국 헌법의 상식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데, 그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제3자적인 입장에 양 세치 혀를 나불거리는 것들이 왜 '중립'인지 잘 모르겠다. 난 상식적인 우파이고, 이건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대한민국의 반민주적인 세력들이 자기 인식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부분 당파 논리 때문에 '세력'만을 볼 뿐 선이 함의하는 게 무언지 모르는 게 아닐까. 그래서 실제로 대립이 이루어지는 "선"에 대해 실질적인 논의를 하지 않고 "당파 논리"로만 문제를 보려는 태도가 가장 비생산적이고 무의미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 언론"의 위상, 언론의 "당파성과 공정성" 사이의 긴장 관계 등에 대해 어떤 실질적인 이야기 없이 언론 개혁 및 언론 장악 시도를 "두 세력 간의 갈등"으로만 보려는 여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