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것저것 쓸데없이 길게 쓰다가 간단하게 줄인다.

 

1.

노정태님(basil83.egloos.com)과 아이추판다님(nullmodel.egloos.com)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 일일이 논평하기는 성가시고, 간단하게 "과연 칸트의 초월적 감성론은 과학에 의해 논박당했는가?"라는 것만 따져보자.

 

노정태님과 아이추판다님은 사실 이 맥락에서 칸트 철학 자체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철학과 과학의 위상에 대한 갈등을 빚고 있을 뿐이니까, 칸트 철학의 주석에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겠지. 아마 주변 분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칸트 철학 전공자의 개입을 기다려 봤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 끼어 들어 본다.

 

2.

일단 외부의 맥락에서 들어가면 과거의 철학 고전들과 그 개념들을 이해하는 게 매우 어렵다는 걸 알아야 한다. 아이언 해킹이 <언어가 왜 철학에서 중요한가>에서 말했듯이 근세 철학에서는 'idea(관념)'이라는 용어가 '정의될 필요가 없는' 단어처럼 사용되었다. 유사한 사례로 17세기 확률론에 관한 담론을 보면 '기대값'의 개념을 정의하지 않고 쓰는 걸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자면 칸트 철학에서는 모든 게 표상이기 때문에 도대체 이 표상이 뭐냐는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철학적 논의를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튼 칸트는 노정태님이 말하는 것보다 좀 많은 맥락을 두고 초월적 감성론의 논의를 펼치고 있다. 노정태님의 설명은 초월 철학 전반에 걸친 설명으로는 타당하지만 감성론 부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인과 법칙의 필연성에 대한 논의는 오히려 개념을 다루는 뒷부분에 해당되는 이야기이지 칸트가 "직관의 형식으로서의 공간 개념"을 끄집어낸 직접적인 계기는 아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난점을 호소했지만) 데카르트부터 시작해서 뉴턴이 혁신하고 라이프니츠가 시비를 건 공간의 (형이상학적) 본질 문제나 경험론자들과 합리론자들 사이에서 시비 거리가 된 공간 지각의 문제(예를 들어 어떻게 거리를 지각할 수 있는가의 퍼즐)를 푸는 것이 칸트 공간 개념의 직접적인 목표이자 계기였을 것이다.

 

간단하게 철학 '내부'의 평가를 설명하자면, 칸트의 논변들이 과연 그 의도를 충실히 완수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한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예를 들어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사용하는 네 개의 논변이 "공간이 선험적 표상"이라는 결론을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적어도 다른 종류의 가정들을 끌고 와야만 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리고 사실 많은 사람믈이 (아이추판다님이 생각한 것처럼) 19세기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이 칸트의 초월적 감성론이 오류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다보니 철학자들은 칸트의 전체 기획에 대해 찬반을 논할 때 감성론 부분은 그다지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현재 영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칸트 해설가 두 명인 헨리 앨리슨의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과 폴 가이어의 <지식에 대한 칸트의 주장> 모두 그렇다). 예외가 있다면 패트리샤 키처의 <칸트의 초월적 심리학>(1990)인데, 그녀 역시 이런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래도 대부분 옳다"는 식으로 (사실은 칸트의 주장을 재해석해가면서) 그를 옹호하고 있다. 아무튼 현실이 이렇다보니 수정주의적 해석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각되는 공간"에는 칸트의 논변이 적용되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흘러갔지만, 전에도 잠깐 언급했듯이 사람의 지각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가장 완강한 칸트의 옹호자라고 하더라도 칸트의 초월적 감성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며, 통상적으로 수학과 물리학의 발달에 의해서 초월적 감성론의 기획이 실패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도 옳다.

 

내가 그래서 아이추판다님의 주장에 끼어들지 않았던 거다.

 

3.

하지만 노정태님이 반론을 제기하고 아이추판다님이 여기에 또 반론을 제기하면서 이야기가 뒤엉켜버리고 말았다. 다시 내 식으로 정리해보자.

 

아이추판다님은 칸트가 생각한 식으로 인간은 인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가지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을 가져다 보임으로써 노정태님을 논박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노정태님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시공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이 요구된다는 것, 그러니까 칸트의 초월적 논변의 핵심 그 자체는 옳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아이추판다님이 칸트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문제에 끼어드는 건, 아주 기본적으로는 "철학은 철학하는 사람에게 내버려두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점은 노정태님의 주장에 맞추도록 하겠다.

 

(1) 물리적 공간과 칸트의 초월적 공간은 다르다는 노정태님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왜냐면 칸트 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칸트 자신이 뉴튼이 다루고 운동 법칙을 세운 그 '공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신이 '물리적 공간'과 다른 '초월적 공간'을 다룬다고 하지 않았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그 공간'의 본질이 '초월적인 감성의 형식'이라고 주장한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물리학 이론의 발달과 측정에 의해서 "곡률을 가진 공간"이 밝혀졌다면 그건 칸트식으로 이해하면 "우리 직관의 형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2) 물론 칸트는 그런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칸트는 왜 자연 세계가 유클리드 기하학을 통해 기술될 수 있는지(혹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왜 자연에 적용되는지), 경험의 세계와 무관하게 어떻게 수학이 진리일 있는지의 문제를 단 칼에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칸트에게 있어서 "우리의 공간 경험은 곡률이 0인 3차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철학 체계 안에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주어진 사실이었다. 칸트는 공간 표상의 본질을 해명하고(네 가지 논변) 뒤이어 그 공간 표상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그것임을 주장하는데, 우리의 공간 표상 자체가 유클리드적이기 때문에 a. 유클리드 기하학이 경험과 무관하게 진리임을 알 있고 b. 유클리드 기하학이 공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미 존재하는 선입견을 정초하려고 한 것이므로, 그 선입견(혹은 숨은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초월적 감성론의 체계는 유지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19세기 철학자들이 이미 칸트의 초월적 감성론을 구제하기 힘든 것으로  버린 것이다.

 

(3) 물론 '합리적 핵심'을 살리려는 노력을, 체계를 재해석함으로써 이어갈 수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칸트의 공간 개념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해 '지각된 공간'에만 적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 심리학의 발전에 의해서 당장 논박당한다.

 

(4) 노정태님은 '표상'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험, 혹은 그러한 경험의 주체로부터 독립된, 보편적인 것으로 구현하려는 칸트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말하자면, 칸트의 초월적 심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이 표상의 성질과 지위이다. 개념의 경우와 직관의 경우가 다르다. 만일 칸트의 논의대로 감성의 질료(즉, 잡다)가 감성의 형식에 의해서 정돈됨으로써 우리에게 직관으로서의 표상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표상이 감각이 아니라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을 감각적 이미지(sensory image)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보편성과 초월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은연중에 플라톤부터 이어진 종적 보편성의 가정에 기대고 있다. 인간이라면 그런 식으로밖에는 인지를 못한다고. 이것이 생물학적 보편성에 기대는 것인지(그렇다면 이건 인지심리학 등 경험적 탐구의 영역이 된다), 아니면 '인지'의 본성 그 자체에 기대는 보편적인 것인지 따질 수 있겠다. 논리, 개념, 이런 것의 초월성이나 보편성은 쉽게 옹호할 수 있으나, 직관의 경우는 그것이 감각적 표상이기 때문에 어떻게 (경험적인 검증/반증과 무관한 차원에서) 초월성과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그 논리를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칸트의 해설가들이 초월적 감성론 부분을 넘어가 '개념'에 관한 논의에 집중하는 것이다.

 

(5) 그러므로 나는 노정태님이 말하는 방식대로 "무엇(이라는 대상)"의 개념을 말하기 위해서는 "어디"라는 공간적인 표상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초월적 공간 표상"의 존재를 주장하는 논변이 성립되는 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노정태님은 "칸트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아이추판다님이 계속 같은 (헛?)소리를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노정태님은 칸트가 가지고 있는 난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아요?"라는 식의 제안이라면 모르겠으나 "칸트 철학은 이렇다"라고 한다면 선뜻 끄덕이며 동의하기 어렵다.

 

칸트의 교묘함이란 '공간'의 물리적 본성의 문제를 '초월적인 표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전략 혹은 기획 자체에 문제를 제기할 있다. 그러한 문제 제기는 그 체계 밖에서 오는 것이고, 그럴 우리는 그 기획/전략이 어떤 선입견 혹은 전제의 산물인지를 알 수 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하냐?"는 공자의 이야기는 "당연하잖아?"를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에 대고 어떤 제자가 "전 안 그렇던데요?"라고 하겠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인간은 누구나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한다. 그 논변이라는 "보는 게 즐겁다"인데, 여기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 "당연한" 거니까. 초월적 감성론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 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의 표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직관되는 것은 아니요. 사물의 관계 그 자체도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 우리가 우리의 주관이나 감각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을 제시한다면 공간과 시간에 내재되어 있는 객관들의 모든 성질과의 관계뿐 아니라 공간의 시간 그 자체까지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현상으로 우리 안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우리 감성의 모든 수용성에서 분리되었을 때 그 자체가 어떠한 성질인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대상을 지각하는 인간 특유의 방식밖에 모른다. 이 방식은 모든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모든 존재자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방식만을 다루고 있다.

 

칸트는 무엇을 근거로 "이 방식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모든 존재자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을까?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생물학적 본성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으로 봐야 할까? 그리고 그 생물학적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 심리학이라고 보는 게 뭐가 잘못일까? 칸트의 독단에 대해서조차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철학 내부에서" 할 일은 아니다.

 

4.

정치적 논점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분명 과학도나 과학자들이 철학에 대해 무지하면서 헛소리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에도 동의하고, "학문 제도"로서나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인문학의 영역이 날로 축소되고 있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대해서 과학주의/인문주의의 날선 대립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그런 대립은, 사실 칸트의 공간론 해석에 걸려 있는 문제도 아니다. 칸트의 공간론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인문학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걸려있다면 그런 가치는 그냥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중간에 끼어들어 유치한 댓글을 달고 있는 몇몇 블로거들을 노리고 쓰는 거다. 그런 식의 정파 논리에 휘말려서 부화뇌동 하기 전에, 정말 궁금하면 칸트 철학을 공부해라).

 

노정태님이 정말 놀라운 재해석으로 칸트의 초월적 감성론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논변을 제시할 수도 있고, 내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칸트 전문가에 의해서 처잠하게 박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과학주의자들의 오만함에 맞서 인문학을 지키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그보다는 현실에서 쟁점이 되는 문제들에서 어떻게 인문학적 사유가 기여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게 맞다.

 

5.

양비론만큼 좋은 없으므로 야비하게 한 줄 덧붙이자.

 

아이추판다님이 칸트의 초월 개념이나 표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맞는 듯하다. 아이추판다님, 철학 잘 모르면서 떠들지 마세요...... (먼산)

 

하지만 아이추판다님의 글이 재미있고 유익한 건 "인간의 인지 과정"에 대해서 실질적인 지식을 주기 때문이다. 칸트 철학의 해석론 혹은 논쟁사에 대해 열 페이지를 아는 것보다 실제 인간의 인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두 줄이라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어차피 구경꾼들도 칸트 철학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이추판다님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이겠지.

 

내 생각에, 이런 경우에는 renegade 소리를 듣더라도 이쪽을 지지하는 옳다. 인문학은 그런  발끈 러쉬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