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회사 일도 바쁘고, 개인적으로 번역 일도 많이 밀려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칸트랑 프로이트에 대해서 읽을 건 왜 이리 많은지. 제대로 읽고 착실하게 정리하는 일 따위를 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땜질용 포스팅이라도 차곡 차곡 쌓아 두면 재산이 될까 싶어서 아이스크림 한 통 먹은 후유증으로 배 아프고 머리 아픈 새벽에 몇 자 적어 본다. 어차피 오타쿠는 "개똥 철학"을 해야 하니까, 책임감 없이 마구 써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학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1.

 

만일 합리성이 진화적 적응의 산물로 제한된 목적과 기능을 갖춘 것이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합리성의] 기초로 삼는 다른 고정된 사실들과 결합해 사용하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전통적인] 철학이 무제한의 범위로 이성을 적용하고 모든 믿음과 가정들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들이 다루기 힘들고 합리적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것으로 밝혀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문제들은 제한적인 진화적 기능 이상으로 합리성을 확장하려는 시도에서 생겨난 결과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귀납의 문제, 다른 정신(other minds)의 존재 문제, 외부 세계의 문제, 목적을 정당화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 Robert Nozick, The Nature of Rationality, xii
* 개발 번역이므로 인용하지 말아 주세요. 강조는 제가 한 것.

 

기술적인 발전을 겪은 주제들의 사례를 들어 보자. (1) 일반적인 복지의 개념(그리고 루소의 "일반 의지'의 개념)과 민주적 투표 절차의 목적에 대한 이해는 케네스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에 의해서 변형을 겪었다. 이 연구는 일반적인 복지 혹은 민주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대안을 결정하는 어떤 절차라도 명백히 만족시켜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주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여러 조건들이 함께 만족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인가는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파레토적인 자유의 패러독스에 대한 아마르티야 센의 연구는 개인적인 권리와 자유의 범위, 그리고 사회의 선택이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들이 쉽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개념들은 재정비를 필요로 한다. (3) 외부 세계의 기본적인 본성, 즉 공간과 시간의 구조는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제시되는 시공간의 전문적 기술(과 수학)으로부터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4)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가장 정확하고 성공적인 과학 이론인 양자장 이론에 기술되고 있는 물리적 세계의 독립적인 성격과 인과의 본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5) 그리스 시대 이후로 최선의, 가장 확실한 지식의 사례로 여겨진 수학적 진리의 본성과 지위에 대한 논의는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서 극적으로 변형을 겪었다. (6) 무한과 그 다양한 층위의 본성은 이제 현대 집합론에 의해서 정교화되고 탐구되고 있다. (7)  가격 기구와 그에 연관된 사적 소유의 제도가 어떻게 합리적인 경제적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이론 없이는,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계산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이론적 논의 없이는, 공산주의 사회들이 왜 그토록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8) 개인의 합리성과 개인들 사이의 합리적 상호작용에 대해서 많은 이론적인 진전이 있었다. 결단 이론(decision theory), 게임 이론, 확률 이론, 그리고 통계적 추론 이론.
─ Robert Nozick, The Nature of Rationality, xvi
* 역시 개발 번역.

 

위키피디아에 한 페이지가 마련되어 있는 노직의 이 책은 1993년 출간되었다. 벌써 15년 이상 지난 낡은 책인 셈이다. 서문에서 뽑아낸 이 두 단락에 대해 뭔가 설명을 붙여 보려고 했지만, 길게 쓰다가 그냥 지우고 간단하게 한 단락만 남긴다.

 

2.

길버트 하만과 함께 노직은 실질적 합리성(practical rationality) 개념에 관한 중요한 이론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의식은 (암묵적으로) 신적인, 완전한 합리성이라는 불가능한 가정 위에 세워져 있는데, 프래그머틱한 관점에서 볼 때 그 문제는 지나치거나 과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논리적으로는 귀납을 정당화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귀납적 사고, 특히 성급한 일반화를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몇 번 겪고 나면 나무 뒤에서 움직이는 노란 건 사자라고 생각하고 조낸 뛰어 달아나는 게 생존에 훨씬 유익하다. 모든 자료들을 다 종합하고 분석해 "확실한 추론"이 이루어질 때까지 앉아 있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철학자가 왜 진화적으로 생존하기 어려운지는 아주 명백하다. (응?)

 

그러므로 귀납을 정당화하는 것, 다시 말해 "단칭 진술로부터 보편 진술로 나아가는 것"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말했던 카르납으로부터조차도 우리는 멀리 와 있다. 우리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귀납적 추론에서의 문제들에 대해서 더 많은 연구를 한다. 베이지언 추론과 결단 논리, 통계적 추측 등이 바로 그러한 분야다. 노직의 암시처럼 오늘날에는 흄으로부터 카르납에 이르는 전통적인 '귀납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3. (추가 및 수정)

이런 글을 올린 건 내가 두 번째 글에서 굵은 글씨로 표시된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계속 (공부라고 하기엔 모자른) 독서를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전적인 철학적 문제들이 전문적인 지식의 발달로 인해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는게 두 번째 인용문의 요지인데, 철학사에 대한 공부만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실질적인 통찰을 얻는 건 불가능하다. 노직이 말한 대로 '전문 분야'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게 워낙 어렵고 힘든 일이다보니 차라리 철학사의 고전 속으로 들어가 문헌학적 작업이나 하고 있는 게 속편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물론 그 작업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지만, 갈 길이 참 멀다는 뜻이다. 철학도 제도적 학문이라 일종의 '분업과 협업'이라고 한다면, 이 어려운 작업에 뛰어드는 철학자들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