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뭐 좋은 책들이 많이 있겠지만 책 소개를 하는 것보다 아이디어를 다시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날로 먹는 포스팅을 하나 더 추가한다.
1.
타다 토미오의 <면역의 의미론>이라는 책이 있다. 나름대로는 과학과 철학 사이의 생산적인 대화라는 주제로 몇 가지 책을 읽는 세미나를 만들 때 포함시켰던 책이다. 면역이란 기본적으로 '자기'와 '비-자기'를 구별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데서 약간의 철학적 사고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책인데, 내가 주목하는 건, 이 면역이란 시스템이 자주 고장난다는 거다. 돼지 공장에서 가루가 되어 날아다니는 세포들이 노동자들의 코로 들어가 호흡기를 통해 체내에 들어감으로써 집단적으로 면역계 질환이 생겨난 사건이 있었다. 돼지와 인간이 매우 가깝기 때문인데 돼지의 세포들을 공격하던 면역계가 그 세포들과 비슷한 자신의 세포들을 공격함으로써 생겨난 질병이었다. 사실 면역계가 도대체 왜 진화과정에서 생겨났는가 하는 것도 흥미로운 문제지만, 아무튼 면역계의 수준에서 '자기'와 '비-자기'를 구별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동시에, 잘 작동하면서도 완벽하지는 않다.
2.
생명 현상에서 내가 종종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많은 유기체적 기능들이 "잘 작동하면서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표현을 쓰면 "딱 그 정도"다. 그 이상은 과도한 것.
나는 철학적 사유가 종종 무균청정실과 비슷하지 않나 싶을 때가 있다. 바슐라르의 표현을 빌면 "생명은 살균된 곳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건데, 개념의 실험실인 이 철학적 사유는 종종 100% 퓨어한 개념의 논리를 요구하는데 그게 필요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다는 거다. 이상형만 추구하다보면 오덕이 되어 2차원 미녀만 바라보다 나이 30이 넘어서 마법사가 되는 일이 벌어진다. 개념의 논리에서만 놀다보면 생기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만, 내 통찰은 그런 데 있다.
3.
인간은 근거 없는 추론을 한다. 귀납이 그렇고 (귀납의 한 형태인) 가추법이 그렇다. 전에도 썼지만 홈즈는 논리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 홈즈는 자신만만하게 왓슨에게 "나의 무기는 연역이라네." 라고 말을 하지만, 흥, 연역 좋아하네, 라는 거다. 너는 가추법을 쓰는 거라고, 나중에 퍼스의 후예들이 밝혀줄 테니까 잘난 체 그만하고 기다리고나 있어.
퍼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은 가추적 사고를 할 수 있나요? 음..... 잘?
기호 논리학의 범주 안에서는 가추법이나 귀납법을 형식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왜냐면, 이건 세계에 대한 실질적인 가설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인간으로서는 차마 버리기 힘든,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정당화할 수 없는, 전제들이 따라 붙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제 본 태양이 오늘 본 태양과 "동일"하다든가.
4.
그런데 철학적 퍼즐을 좋아하는 분들이면 알겠지만 동일성이란 매우 머리 아픈 문제다. A라는 배를 타고 물 위로 나가 B라는 배와 부품을 하나둘씩 바꾼다고 할 때, 언제 A와 B는 바뀌는 것일까라는 식의 문제가 그렇다. 동일성은 개념인데, 개념은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역계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동일성이란 개념을 만들어내기 전에 인간은 동일성을 인식하는 인지 구조를 가졌다. 안 그러면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어제 같이 잔 마누라가 오늘 같이 자는 마누라랑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화목한(혹은 지겨운) 가정 생활을 하겠나.
하지만 철학은 이런 문제에 대해 흥미로운 퍼즐을 만들어낸다. "니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는 겨."라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판타 레이! 응? 뭐? 만물 유전이라고!
수학에서 따지는 여러 패턴의 동일성들(혹은 동일성의 유사 개념들)이 존재하듯, 우리가 따지는 동일성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그 개념들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각기 다른 역할과 다른 정도의 중요성을 갖는다. 서로 다른 나뭇잎들을 "나뭇잎"이라고 묶는 게 개념의 폭력이라고 하는 지적 역시 그렇다. 그 지적이 유용하고 필요한 영역이 따로 있다.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지식 없이 동일성이라는 개념에만 천착하는 것, 혹은 동일성과 차이라는 개념의 유희에만 머무는 것, 혹은 동일성의 개념을 '정련'하고자 하는 노력이, 가끔은 좀 과도한 것 아닐까?
5.
귀납을 정당화할 이유가 없는 것은, 우리가 자연의 불변성을 전제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귀납적 사유들을 그 유형(과 목적 등)에 따라 어떻게 정당화하고 활용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필요하지만, 귀납적 사유 그 자체를 형식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것이다. 마치 생태계 전체에 대한 연구를 실험실에서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헬리코박터 균은 위염을 일으킨다. 이건 대조군 실험을 통한 통계적 추측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통계적 추측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한다 (아직 의학계에서는 헬리코박터균에 대한 논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만일 헬리코박터균이 어떤 작용을 통해서 위염을 유발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밝힐 수 있다면, 이건 더 이상 통계적 추측, 즉 귀납적 추론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메커니즘에 의해서 위염이 발생한다'는 건 귀납적 추측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렇게 '아래로' 내려가면 세계의 구조(의 불변성)에 대한 믿음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믿음을 의문시하는 건, 정말로 한가로운 지적 퍼즐 논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6.
물론 어떤 규칙성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활동이다. 왜냐면 주어진 데이터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패턴이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이론의 미결정성). 베이트슨은 "과학은 예측하지 않는다."고 간단하게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 가장 단순한 설명을 선호하라는 오컴의 준칙도 그 자체로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굿맨 식으로 말하자면 미래에 투사가능한 술어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규칙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정당화'란 과도한 게 아닐까. 단지 우리는 자연의 제일성, 불변성을 전제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지식 체계도 그 기초 위에서 세워질 수밖에 없다. 형식적으로 일반화된 귀납 추론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어디에선가는 "딱 그 정도"까지만 하면 된다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니겠냐고, 나는 노직의 글을 빌어서 그런 생각을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 아래에는 개념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세계의 풍요로움을 오히려 놓치는 게 아니겠냐는 소박한 의문이 들어있지만 말이다.
7.
더 계속하면 (이미 그러고 있지만) 동어 반복이 될 것 같다.
앞에서 타다 토미오의 책을 인용한 것은, 진화적 적응에 의한 제한적인 합리성(혹은 이성적 사고)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유비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개념 체계도 면역계처럼 유기체의 기능일 뿐이다. 잘 작동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은. 마치 면역계가 있기 때문에 암이라는 질병이 가능한 것처럼, 개념화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철학이라는 병이 생겨나는 건 아닌지.
8.
근데 책임지지 못할 이런 거창한 이야기를 마구 해도 되는 거야? 응? 거창한 이야기 좋아한다는 점에서 이것도 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