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고등과학원 이종필 박사가 쓴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를 읽고 있다. 저자에게 동의하건 아니건, 이 글들이 우리 사회에서 좀 더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책의 출간을 환영한다. 다만 이론물리학을 공부한 박사이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것이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이 책을 잡게 만드는 동기라면, 이것이야말로 합리적 태도와는 거리가 좀 있는 신비화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이 책의 집필 동기에 부합하는 독서는, 역시 마찬가지로 합리성을 가지고 저자와 대화를 하는 것일 게다.
읽어가면서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이슈에 대해 이것저것 적어 본다. 뭐 이종필 박사의 책을 핑계 삼아 포스트 하나를 늘리려는 것이기도 하고, 혹시나 이 책을 읽고 더 읽을 거리를 찾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 분들을 위해서 몇 자 첨언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책 전체에 대해서 총평을 쓰기 보다는 몇 가지 이슈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얘기를 하겠다.
1.
먼저 인류 원리─책에서는 뒤쪽에 등장하지만─에 대해서 몇 마디하는 걸로 시작해 보자. 내가 이해하는 인류 원리란 이런 것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이나 초기조건, 혹은 그와 관련된 상수들이
무엇인지 결정해야 할 때 (지능을 갖춘) 생명체의 출현을 배제하는 범위의 것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이종필 박사는 두 가지 예를 든다. 하나는 (현재의 빅뱅-인플레이션 모델 우주론에서) 우주의 팽창 속도를 결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우주 상수>의 값의 범위이고, 다른 하나는 초끈 이론에서 여분 차원이 응집되어 있는 기하학적 구조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인류 원리는 "설명 이론"인 동시에 "탐구 방법론"으로서 두 가지 지위를 가진다. 이것은 앞에 따옴표로 처리한 문장을 다른 각도에서 재진술하는 것이기도 하다.
(1) "우주가 왜 이런 형태가 되었나"에 대해 (그 필연성에 관한) 과거로부터의 인과적 설명을 제시할 수는 없어도 "우리가 왜 이런 형태의 우주를 보는가"는 설명할 수 있다. 만일 우주의 법칙이나 초기 조건들이 달랐다고 한다면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법칙, 초기 조건, 상수들을 탐구할 때 우리의 존재 자체를 전제로 해서 그것을 허용하는 범위를 탐구하면 된다.
내가 볼 때,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충분한 과학적 설명의 이상에는 들어맞지 않아도 합리적이고 유용한 견해이다. 다만 이 인류 원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딱히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한다. 인류 원리의 신비화가 그것인데 위의 내 말과 다음의 말을 비교해 보라.
인류 원리에 따르면 우주가 생겨날 때 물리법칙과 초기 조건은 우리의 존재를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거나 우리가 우주의 존재를 설명하는 열쇠라는 이해가 가능하다. 즉 우리 혹은 지성적 존재의 탄생을 위해서 우주가 만들어진 것이다.
조금 극단적인 형태로 진술한 이런 설명은 우주의 역사를 인간을 위한 드라마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얻어지는 것은 인간의 지위가 신비스럽게 격상되는 것이고 말이다. 내 생각에 과학자들이 대중들에게 해야 하는 말이란 이렇게 과학의 범위를 벗어난 의미 부여의 과도함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마지막 챕터에서 이종필 박사가 "인류 원리"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원용해서 "광우병 사태와 촛불 시위"에 접근하는 것은 조금 신중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종필 박사는 정치적 과정에서 (체계나 행정적 목표, 단기적 성과 등 다른 무엇보다도) 결국 "사람이 중요한 것"이라는 상식적이어서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인류 원리"라는 개념을 원용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데, 그 논지에 대해서 내가 비판적인 건 아니지만, 물리학 이야기를 끌어 들이기엔 좀 거리가 있는 데다가 그 과정에서 애초의 인류 원리를 오해/곡해할 여지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술술 읽히는 이 책의 서술은 장점이어서 이런 문제에 대해 그다지 주의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에서도 인간의 존재가 중요한데, 정치에서 사람이 실종된다는 게 말이 돼?"라는 식으로 정리가 되긴 한다(정말이지 그다지 막히는 곳 없이 술술 읽힌다. 그다지 논리적 비약이 많지 않고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 가능한 선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위해서 물리학의 인류 원리를 끌어들이다 보니 무게감의 균형이 조금 맞지 않는달까 하는 느낌이 들고, 게다가 (이미 신과학주의자들의 온갖 곡해들이 넘쳐나는데) 인류 원리에 대한 오해의 실마리를 제공하시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2.
사실 이종필 박사와 약간의 친분이 있어서 비판이든 찬사든 오버하지 않는 미덕을 지키며 써야 하는 글이긴 한데, 뭐 만사가 그렇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글이 반갑고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아쉽다. 반가운 이유는, 이런 종류의 담론이 소통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고,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이 책이 나를 위한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 교양 서적으로 좋은 책들을 볼 때 가끔 느끼는 건데, 책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적절한 독자가 못된다는 의미에서다.
아무튼 펜로즈 타일 등으로 일반인에게 좀 알려져 있는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 경은 <황제의 새로운 마음>에서 "물리학자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다"라고 익살섞인 너스레를 떤 적이 있다. 사실 어느 한 분야의 과학자라고 해서 다른 분야에까지 식견이 넓은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충분히 비판적인 방법론, 즉 과학적 방법론의 훈련을 거친) 사회 과학의 전공자들이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것에 비해 자연과학 전공자의 이야기가 더 정곡을 찌를 것이라는 선험적인 기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종필 박사의 글에서처럼 자연과학의 개념들이나 모델들, 혹은 연구 방법론이나 거기서 얻어진 직관들이 새로운 담론-이야기 방식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측면을 지적하도록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생산적인 담론을 제공하고 있다.
이 생산적인 담론에 대한 화답은 또 다른 글에 이어서 쓰기로 하고 일단은 하던 이야기, 약간의 부연만 하기로 하자. (인터넷 언론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연재하던 글이어서 그런지 글은 일정한 선 아래로 더 파고들거나 혹은 어떤 선을 넘지는 않는 듯 보인다는 게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난 왠지 이런 글들은 좀 더 막 나가 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아 물론 독자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편집자의 입장이 된다면 전혀 다를 것이다. 원하는 책을 읽고 싶다는 것과 더 많이 읽히게 만드는 건 참 다른 문제니까 말이다.
3.
아무튼 지금 이 책의 제4부인 "인간" 편을 놓고 이야기하는 중이다. 이 제4부는 양자 역학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골치 아픈 분들도 있겠지만 (내게는 친숙한 이야기니까) 과학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건너 뛰고 이 제4부의 구성부터 좀 보자.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진 않고 내 식으로 정리해서 쓴다.
(1) 양자 역학의 "해석"에 대한 교양 수준의 이해 - 확률론적 해석, 코펜하겐 해석 등
(2) 우주 시대는 유인 우주쇼보다 더 중요한 기초 과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시사 논평
(3) 양자 역학에서의 관찰자의 지위 : 관찰(측정)과 관찰자, 그리고 실재
(4) 우주론에서의 우주상수와 인류 원리
(5) 정치에서의 인류 원리 : 광우병 사태에서 나타난 한국 정치의 어떤 측면에 대한 비판
왜 이렇게 나열을 했냐하면, 이 다섯 개의 글이 잘 안 묶인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새로 전면적으로 쓰고 구성하기도 어렵고 적절하게 글들을 배열하면서 새롭게 글을 추가하고 고쳐 쓰면서 만들어진 묶음이 아닌가 싶다. 편집자는 나름대로 고생 많이 했을 듯 하지만, 그래도 말끔하게 잘 이어지거나 제목에 잘 묶여 들어가진 않는다. 예를 들어 (2)에서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에 열광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논평은 뒤에서 우주론론(과 상대성 이론 및 양자 역학 등 근본적인 물리학 이론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배치된 듯 하지만 "인간"이라는 제목하고는 잘 안 어울린다. (1)번 글은 (3), (4)의 이야기의 사전 지식으로 쓰인 것이고, (3), (4)는 (5)의 이야기의 전제가 된다. 그렇게 보면 (5)가 가장 중요한 글이 되는데, 제4부에서 (5)가 과학 이야기와 사회 이야기를 섞은 유일한 글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5)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기에 (3), (4)의 이야기가 더 과하다고나 할까. 더 심각하고 무겁고 의미심장한 이야기여서 (5)는 오히려 부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3), (4)에서 분량과 수준을 고려해 아주 평이하고 쉬운 수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 심각성과 중요성이 충분히 다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중에 이 책의 다른 챕터들에 대해서 쓸 기회가 있겠지만, 이런 이유들로 인해 제4부는 조금 균형감각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 이 책에서 가장 설득력이 높은 부분은 과학적 지식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과학 문화를 성숙시켜갈 것인지, 과학적 사고가 왜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모델이 되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이런 저런 물리학적 지식들, 혹은 물리학계의 이야기들이 섞여서 지식과 재미, 그리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제4부는 그런 점에서는 약간 아쉽다는 뜻이다.
사실 나같은 철학 오타쿠는 제4부의 이야기가 가장 친숙하다. 양자 역학이란 조금만 접해도 신기한 것들 투성이여서 지적 퍼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현기증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4부의 기초를 이루는 이야기들은 참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떡밥 투성이라서 반가운데, 그 떡밥으로 낚은 물고기가 예상외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롭게 글을 쓰기보다는 광우병 사태에 대해 쓴 마지막 글을 살리려고 하다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4.
내가 아는 다른 실험 하나를 언급해 보자.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지만 아주 친숙한 이야기인데 데이빗 앨버트의 <양자 역학과 경험>은 첫 챕터에서 이 실험을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A와 B라는 유형의 븐류 장치가 있다고 해보자. A 장치는 입자들을 "빨간" 입자와 "파란" 입자로 나누고, B 장치는 "뜨거운" 입자와 "차가운" 입자를 나눈다 (뭐 색이나 온도는 비유적인 표현이고 물리학을 아는 분들에게 스핀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불필요하고, 모르는 분들에게는 머리가 아프니까 그러려니 하시길 바란다). 아무튼 뜨거운 입자와 차가운 입자, 빨간 입자와 파란 입자가 나뉠 확률은 다 50%로 동일하다.
놀라운 건 이런 것이다. A 장치에서 "파란" 입자들만 걸러 내어서 B 장치를 통과시켜 "뜨거운" 입자만 골라낸다. 그럼 우리는 "파랗고 뜨거운" 입자들만 갖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양은 정확히 최초에 집어 넣은 양의 4분의 1일 것이고). 그런데 이 입자들을 다시 A 유형의 장치에 집어 넣으면 다시 똑같이 50%씩 "파란" 입자와 "빨간" 입자가 나뉘어 진다.
즉, 우리가 측정/관찰/실험하기 전에 "빨간" 혹은 "파란" 입자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이걸 EPR 패러독스와 결합시키면 아주 황당해지는데, 어쨌거나 오랜 논쟁과 실험 끝에 나온 결론은, 미시 세계는 원래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처음부터 빨간 입자 파란 입자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건 무의미하다. 우리는 측정을 통해서만 그런 속성이 확률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이런 멋진 (사람 머리 아프게 만드는) 미시 세계의 속성으로부터 양자 역학의 이론이 가지는 특징(코펜하겐 학파의 해석은 실증주의적이다. 즉 우리는 측정된 양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이나 관찰자의 위상에 대한 온갖 심각한 철학적 논의들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게 골치 아픈 이야기다보니 아주 깊이 들어가지는 않고 그냥 인류 원리로 넘어가 범박한 정치 이야기로 끝나는 건 좀 아쉽다. 사실 이 제4부가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을 탐구하던 과학에서도 인간의 존재라는 지위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그런데 하물며 정치나 사회에서 그걸 잊으면 안되지."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배치이고, 그 과정에서 재미있는 물리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부수적인 효과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처럼 이 부수적인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사람은 좀 더 하드한 과학 이야기로부터 사회나 인간에 대한 좀 더 심오한 통찰로 넘어가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에서는 "이론이 대상을 창조한다"는 명제가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저널적 용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경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바로 이 명제(와 그 배경으로서의 양자 역학에 대한 해석)와 관련이 있다. 전에 다른 포스팅에서 쓴 적이 있지만, 양자 역학이 태어나기 전 어떤 자연 과학자도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내가 연구하는 대상이 만들어지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양자 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그런 의미로 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관찰 행위에 의해서 비로소 대상이 된다"거나 "어떤 측정을 하느냐에 따라 대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겠다. 많이들 아시는 이야기지만 광자를 비롯한 소립자들은 입자로 행동하기도 하고 파장으로 행동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어떤 실험/관찰/측정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광자"나 "전자기파"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도 아실 거고.
하지만 이게 사회 과학에서 원용되면 얘기가 좀 복잡해진다. 가뜩이나 자연 과학처럼 정량화가 잘 안되어서 여러 가지로 민망한 사회 과학이 객관성을 부정당하면 더이상 학문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라고 우려와 반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론이, 혹은 실험이 대상을 창조한다"는 것이 전혀 무의미한 것도 아닌 것이, 사회학이나 심리학의 조사나 실험 중에서 접근법이 이미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의도한 결과를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자 역학에서 관찰자/관찰/실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논의/숙고는 사회 과학에 어떤 통찰이나 암시를 제공하는지, 그런 걸 따져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제1부에서 뒤엠-콰인 명제, 즉 증거에 의한 이론의 과소 결정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나온 적이 있어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조금 더 심도깊은 논의를 기대했는데 그 이야기는 아무래도 다른 책을 통해서나 다른 글을 통해서 들어야 할 모양이다.
5.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요소들은 물리학자로서 배우고 경험하고 고민해 본, 이론과 경험 사이의 관계에서 얻어진 통찰들이다. 과학을 과학으로 만들고, 과학자를 과학자로 만드는 요소들(이론, 경험 등등)이 사회 현상이나,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적용된다면 어떨까 라는 궁금증에 답하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이 책(글들)을 읽는 것은 즐겁고 재밌다.
덧붙이자면, 아마 이 책을 읽고 즐거움을 느꼈다면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마 같은 원리로부터 다른 대안적 해석이, 종종 정 반대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한 해석조차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치 "증거의 이론에 대한 과소 결정"처럼 말이다. 유비나 원용이 가지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 때문인데, 이종필 박사의 책을 그 정도로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독자들이 늘어나면 필자의 바람대로 좀 더 생산적인 담론이 활성화되지 않을까. 그때 가면 이 책의 후속작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과학적 마인드와 과학적 상상력이 사회를 해석하고 변혁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가능해 지는 건 그때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일단 이 책이 좀 팔리고 나서. 이 책을 읽어야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생기지 않겠나. 일단 사회적 논의의 새로운 통로가 생기기를 바라 본다.
다음에는 앞에서 약속했다시피 이 책의 '생산적인 담론'을 좀 더 밀고 나가보는 글을 하나 쓰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