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뭐 실질적이고 예리한 사회적 통찰이나, 뭔가 떡밥과 낚시가 있는 재밌는 포스팅은 내가 할 몫이 아닌 것 같고, 그냥 철학이나 연습해 보자. 오타쿠 정치 세력화를 소재로 한 철학 연습 101.
1.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물어보자. 오타쿠를 오타쿠로 만드는 요소가 뭘까. "X를 X로 만드는 것", 이게 "우시아"라고 하는데, 그걸 현대적으로 이해하면 본질쯤 되겠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게 "내적 속성"에 의해서 결정될 거다. 자연종(natural kinds)들은 보통 그렇게 정의되니까. 산소를 산소로 만드는 건 H2O라는 내적 속성에 의해서 인 것...... 나는 문과지만 H2O가 산소라는 것쯤은 알고 있..... 쿨럭. 아무튼 한 대상이 갖고 있는 여러 속성들 중에서 "본질적인" 속성이 있는 거라는 생각은 꽤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이해.
그런데 내적인 속성과 별로 관계없이 하나로 묶이는 게 있는데, 두 가지 사례를 언급할 수 있겠다. 하나는 "게임"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 도입한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고, 다른 하나는 "잡초"처럼 기능적으로 정의되는 단어이다. 좀 더 설명해 보자. 게임은 서로 비슷하지만 모든 게임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속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A와 B는 이런 점에서 유사하고, B와 C는 저런 점에서 유사한데, C와 A는 그런 점에서 유사하기 때문에 이게 전체적으로는 한 묶음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면, 그런 걸 가족 유사성이라고 부르는 것. 이에 반해 잡초는 보통 "정원에서 내가 의도해서 기르는 것이 아닌 모든 식물"이 다 잡초다. 혹은 "별 거 없어 보이는데, 내가 이름을 모르는 것"도 다 잡초가 된다. 그래서 옥수수밭에 난 장미는 잡초가 될 수도 있고, 산길을 가다 산삼에 걸려 넘어져도 잡초에 걸려 넘어졌다고 생각하고 지나가면 그뿐이다.
그래서 "게임"이나 "잡초"에 대해 본질적인 내적 속성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는 거.
물론 이런 얘기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 위한 포석이다. <그럼 "오덕후"는 어떤 경우에 해당할까. 오덕후를 오덕후로 만드는 본질적인 내적 속성이 있을까?>
2.
내가 오덕후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고, 예전에 구경 삼아 다녔던 성인 커뮤니티 얘기를 해 보자(변명이 아니라 구경삼아 다닌 것 맞다. Curious Minds 아닌가. 네이버 카페 가입 100곳을 채워서 늘 지우고 새로 가입하는 인간이다. 점성술 타로 사주 카페부터 시작해서 초딩들이 모이는 다이어리 꾸미기 카페까지 가입해 보았다).
아무튼 국내 최대의 성인 커뮤니티라는 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보다 보니, 꽤 재밌는 게, 일단 이 분들은 사회적으로 적당히 먹고 살 만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누라 몰래 용돈 모아서 한 달에 한 두 번 가시는 분도 계셨지만, 한달에 일이백씩 혹은 삼사백씩 쓰면서 여대생 스폰서를 하시는 분도 계셨고, 대충 봐서 거의 오륙백 이상을 유흥비로 쓰시는 분도 상당수였다. 일단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지위상 크게 이질적인 집단들은 아니었다는 것.
물론 이 분들의 <본질적>인 공통점은 <성매매를 합법화하라>라든가 <대딸방을 허하라>는 정치적(!) 구호였다. 그래서 늘 업소와 언니에 대한 정보를 엄청나게 열심히 공유하고, 많은 고급(?) 정보를 가진 분들이 존경받는, "그들만의 리그"가 거기에 있었다. 나름대로의 판타지 월드가 있다고나 할까. 레벨업을 해서 새로운 스킬을 보이거나 잡은 몹(?)을 자랑함으로써 존경을 받는 명예 시스템.
물론 사소한 분쟁도 있었다. 아끼던 단골 언니를 업소에 그만 다니게 하려고 (<은퇴>시킨다고 하더라) 빚을 대신 갚아줬다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천만원 정도는 아니고 그 절반 정도는 되는 돈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1. 낭만적이다, 멋지다. 2. 그래도 좀 과한 거 아니냐. 3. (그분이 뭘 노린 게 아니라 그냥 아끼는 마음에 준 거라는 얘기에) 따로 볼 것도 아닌데 왜 그러셨냐 4. 뭐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신경 안쓴다 등등의 의견이 있었는데, 많은 공감을 얻은 의견 중 하나는 5. <왜 은퇴시켜서 그 좋은 언니를 다른 회원들이 못 만나게 하느냐. 이건 해당 행위다>라는 비판이었다. 역시,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집단이었던 거다. 진짜 좋은 언니는 자기가 아껴두고 싶어하지만, 그래도 <같은 커뮤니티를 이루고 정보를 공유하는 한> 다른 회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면 안된다는, 아주 옳바르고 훌륭한(?) 공동체적 가치를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것. 이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이 분들은 절대로 정치적인 집단은 될 수 없었다.
누군가 <노무현 XXX 때문에 맘놓고 X 치러 다닐 수도 없다>고 불만을 올린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불편한 심정을 호소한다. <솔직히 XXX에 못가게 하는 건 아쉽지만,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XXX당을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라고 말이다. 또 다른 경우인데, 극우 보수인 한 의원이 성매매 합법화에 대해 은근슬쩍 동의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는데, 누군가 역시 불편한 심정을 표시했다. <다른 거 다 안 보고 XXX 허락해준다고 지지할 수는 없다. 그런 꼴통 XX는 아무리 성매매를 전면 합법화해도 못 찍을 사람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재반론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수구건 좌파건, 나는 XX만 갈 수 있으면 됩니다>라고. 즉, 그 많은 공통점과 공통의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정치 세력화"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1. 일단 좌파라고 성매매에 무조건 반대할 거라는 선입견은 버리시고
2. 사회적 계층도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해서 동질적인 집단인데다 어떤 면에서 이해관계도 일치하지만
3. 절대로 같은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오타쿠가 바로 그렇다. 보통의 오타쿠들이 이 "성인 업소 오타쿠"들보다 훨씬 더 동질적이고 같은 이해관계에 목을 매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물며 이 "성인 업소 오타쿠"들조차 정치 세력화가 어려운데 말이다.
물론 오타쿠들이 문화적으로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해있는 언더 집단이라고 볼 수도 있고, 마지널한 존재들일 수도 있겠다. 뭐든 주류는 아니니까 오타쿠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부자 오타쿠가 없는 것도 아니고, 잘 생기고 멀쩡한 오타쿠가 없는 것도 아니며 진짜 반사회적인 오타쿠가 있다면 적당히 잘 살면서 특이한 취향을 가진 정도의 오타쿠도 있을 거다. 그러므로 단지 "취향"이 좀 유사하다고 해서 정치적 세력으로 "동지여 어서와서 뭉치세"가 가능한 건 아닐 거라는 거다.
3.
자 본질론은 이만 하면 되었고 (언제 했는지) 이제 기능론으로 넘어가 보자. 오타쿠가 정치 집단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오타쿠적으로 정치를 해보겠다고 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말이다.
다만 "오타쿠적으로 정치를 한다"는 게, (1) 본질적으로 정치라는 걸 부정하는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2) '오타쿠적'이라는 건 어떤 정치 집단과도 결합가능한 (메이저는 아니지만) 마이너한 "정치 방식"의 하나일 뿐인지, (3) "오타쿠적"이라는 건 특정한 가치 지향을 내포하고 있어서 특정한 정치 이념과만 어울리는 것인지, 이걸 먼저 따져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도대체 오타쿠적이라는 게 뭔가>를 물어야 하겠고.
이글루스 등에서 하는 이야기를 보면 "정치에 대해 심각할 이유가 있나?"는 전제 아래 "매니악함+디씨갤스러움"이 결합된 태도를 "오타쿠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평이하게 생각하면, 자신들이 좋아하는 매니악한 하위 문화의 여러 소재들을 이용하는, 적당히 경박하고 독특한 분위기 정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사회당 덕후 위원회"를 보시면 아시겠다.
원론적으로 생각하면, 니체의 "은유"에 대한 사라 코프만의 지적질을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니체는 상당히 자유분방하게 비유와 과장된 수사를 사용해서 철학질을 했는데, 이런 비유의 남발은 철학 자체로 보면 파괴적이고 데카당스하고 아방가르드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귀족적인 것이다. 일단 모든 비유는 그 비유가 성립하고 소통되는 특정한 맥락과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나루토 아저씨스러운 XX"라든가 "지금이 너의 리즈 시절이냐?"라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상당한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고, 어떻게 사전적인 지식으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소스들을 같이 즐기는 사람이 아니면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철학에서야 신약성서의 예수처럼 "알아 들을 사람은 알아 들어라"라는 식으로 비의적인 태도를 가지는 게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리고 내 블로그의 글들처럼 매우 불친절한 인용과 언급으로 가득 차더라도 어차피 찾아오는 사람이 적으면 별 문제 안되지만), 그게 정치에서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니, 자네가 그런 식으로 딸XX치며 뭔가 해소하고 싶은 건 알겠지만, 그걸 우리가 보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느낌이랄까.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예 대화 상대에서 배제한다고나 할까 (사실 이 블로그의 글들도 좀 그런 경향이 있지만).
노무현의 공과 중에서 가장 비판을 받아야 할 것 중 하나가 이 "편가르기"의 문제였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결별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누가 옳건 그르건 따지기 전에 말이다). 정치라는 게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세력이 되려면 (즉 전국 정당 정도가 되려면) 그 정강과 활동이 기본적으로 보편화의 계기를 내부에 갖고 있지 않고서는 어렵다 (유럽에서 노인당이 그저 그만한 이유가 괜히 그런 게 아니라는). 덕후스러운 정치적 활동은, 소수의 아군들만을 위한 유희와 위안의 정치이지 설득과 확장의 정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뭐 대인배 정당에서야 "우리는 덕후님들마저 포용하는 정당입니다"라고 어느 정도 지분을 떼어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 집단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정치적인 파벌로 성장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시해도 크게 문제가 안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냥 재밌게 놀고 분위기 환기시키는 정도가 딱 아닐까.
4.
마지막으로, 그냥 문득 든 생각인데, 어차피 우리나라 인터넷에서 덕후 덕후 하는 게 정말로 매니악한 오타쿠 문화도 아니지 않나 하는 것. 위에서야 그냥 적당히 섞어 썼지만, "덕후스러움"이라는 건 고작 하위 문화에 속한다는 표지들의 "분위기"만 즐기는 정도가 아닐까 싶고 (그래서 일종의 담론 층위에서의 수사적 특징에 머무르는 것), 그게 특정한 어떤 대상이나 분야에 대한 매니악한 오타쿠를 반드시 전제로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인터넷을 거의 안 하면서 프라모델에 관한 정보들에만 미쳐있는 친구를 아는데 (하나 조립하면 다음 걸로 넘어가며 인생을 그런 조립질로 점철시키는) 이 친구는 "덕후스러움"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훌륭한 오타쿠다. 그러나 이런 오타쿠들은 정치에 있어서는 일반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그걸 굳이 따로 볼 이유도 없다.
그냥 이런 긴 소리 줄이고 "찌질해도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소하지만 당연한 사실을 하나 환기시킨 것 이외에 아직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도대체 사회 경제적 조건에 대한 이해와 결합하지 않는 정치 세력화 담론이 얼마나 실질적이겠나.


